【STV 김충현 기자】윤달에는 개장·이장 작업이 활발하다. 예로부터 윤달은 하늘의 감시가 쉬는 기간으로 여겨져, 불경스러운 행동도 신의 벌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경기 의정부에 잠들어있던 여섯 분의 유해도 경기 파주로 옮겨갔다. 그 주인공은 안동 장씨 희양공파 일원들이다. 희양공파는 조선의 명문가다.
때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성계는 고려 말기인 1388년, 요동 정벌을 위해 출정했으나 위화도에서 회군했다.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는 4년 후 조선을 건국한다.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난 것으로 역사에 기록된 장사길(張思吉)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때 공을 세웠다. 신하들이 이성계에게 즉위를 권유할 때 장사길도 함께 했다. 장사길은 조선의 1등 개국공신이자 회군공신으로, 이성계와 동서지간이었다. 즉 이성계의 정치적인 동지이자, 친척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시호는 희양(僖襄)이었다. 안동 장씨 희양공파의 비조로 여겨진다.

동국장묘 한태우 대표는 지난 19일부터 22일까지 희양공파 집안의 개장·이장 작업을 진행했다. 의정부 가능동 선산 다섯 곳에서 여섯 분을 파주 맥금동으로 옮겨 모셨다. 묘지와 묘태석도 같이 모셨다. 희양공의 아들과 그의 후손들이 약 600년 만에 한 자리에 해후하게 된 것이다.
한 대표는 10년 전부터 희양공파의 개장작업을 도맡아 관리해왔다. 이번에도 문중에서 새로 옮겨가는 묘역의 디자인 작업을 맡겼다. 문중은 고인들의 유해를 산골하고자 했다. 선산의 관리가 힘드니 한 데 모시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한 대표는 ‘묘태석을 옮기니까 산골은 하더라도 묘역은 같이 가는 게 낫겠다’라고 생각했다. 문중에서도 동의했다.
개장작업은 처음부터 여의치 않았다. 일단 개장을 위해 의정부 시청에 신고를 하러 갔더니 “가족관계증명서를 떼어 오라”고 했다. 나이가 어린 공무원은 한자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한바탕 소동 끝에 수기로 가족관계증명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개장 허가가 떨어지자 본격적인 개장 작업에 돌입했다. 그런데 광중(壙中)이 깊어도 너무 깊었다. 광중이란 널을 안치하기 위하여 판 구덩이를 말한다. 한 대표는 “파주에서 2m(미터)가 되는 건 봤는데 의정부는 3m였다. 정말 깊었다”라고 혀를 내둘렀다.
특이한 건 또 있었다. 파묘를 해보니 회벽은 없고 숯가루가 빙 둘러져 있었다. 한 대표는 “‘여기서부터 광중의 시작이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숯을 전체에 깔아놨다”라고 말했다. 자기(瓷器)로 광중의 네 귀퉁이를 표시한 것도 눈에 띄었다.
희양공파 문중의 묘는 숯가루를 쳐서 가풍을 드러냈다. 그런데 딱 한 사람의 묘만 회벽을 친 게 눈에 띄었다. 안동 김씨 출신으로, 안동 장씨 집안에 시집온 여성의 묘였다. 한 대표는 “이 분이 안동 김씨 출신이라, (자신의) 집안 가풍으로 묘를 쓰지 않았을까 싶다”라고 했다.
회벽을 깨는 건 쉽지 않았다. 벽을 깨는 데만 5시간이 소요됐다. 먼저 정으로 쪼아서 흠집을 내고, 구멍을 냈다. 그 구멍 안으로 들어가서 유해를 확보했다. 거대한 벽이라 상반신이 들어갈 정도만 구멍을 냈다.
숯이든 회벽이든 당시 양 가문의 위세가 대단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장비가 올라올 수 없는 산꼭대기에 숯과 회벽을 친다는 건 어지간히 돈이 많아야 한다. 한 대표는 “(지금) 시멘트 한 푸대 20kg을 들고 나르기도 힘들다”면서 “회벽을 1m 두께로 사방으로 친 건 (그때를 생각하면) 엄청난 거다”라고 혀를 내둘렀다.
희양공파의 여섯 사람의 유해가 의정부 가능동의 다섯 개의 산에 나눠져 모셔져 있었고, 이를 파주 맥금동의 상곡재사(上谷齋舍)로 옮겨 모셨다. 재사는 종중(宗中)이나 문중에서 제사를 지내거나 후손들이 학문을 닦기 위해 모이는 건물을 의미한다.
한 대표는 “요새는 ‘귀신이 우리를 살려주는 것도 아닌데 제사를 왜 지내냐, 벌초 힘든데 무덤을 왜 만드냐’ 하는데, 그런 게 후손들이 결속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라고 했다. 문중 회의록을 작성해 향후 재산 분할 때 참고하기도 한다고.
대작업을 끝낸 한 대표는 또 다음 작업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무덤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한다. 한 대표는 “우리나라 역사는 묘지가 없었으면 기록되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묘 안에서 인물의 일기나 부장품이 발견돼 역사가 기록됐다”라고 했다.
600년 만에 한자리에 모인 명문가 자제들이 세심한 후손들 덕분에 한바탕 이야기꽃을 피우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