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기 폭파범 김현희는 내 남편과 대학 동창이었다
전 대남공작원의 아내가 남편을 잃게 된 통한의 사연을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태권도 사범인 남편과 함께 해외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던 북한중산층 저자의 가족은 아들의 사랑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평양당국으로부터 쫓기는 도망자가 된다. 그 숨 막히는 추격의 과정에서 남편이 죽고 남쪽으로도 북쪽으로도 갈 수 없게 된 저자가 가슴을 뜯으며 한 달 반 만에 폭풍처럼 써내려간 이 책에서는 사랑이 죄가 되는 답답한 북한의 체제와 평양의 실상이 다큐멘터리처럼 낱낱이 묘사되어 있다.
이 책에는 그의 남편이 다니던 대남침투간첩 전문양성 학교인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의 실태와 혹독한 훈련 내용, 저자가 직접 보고 들은 최은희 신상옥 부부, 황장엽과 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남편을 통해 알게 된 판문점의 대립상황과 강릉 앞바다 잠수함 침투사건에 대한 정황들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무엇보다 현재까지 진위논란이 되고 있는 KAL기 폭파범 김현희가 그의 남편과 대학 동창이라는 사실, 아웅산 테러 때 피해 입은 북한 측 요원들이 남편의 동료였다는 전언은 첨예한 논란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보는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평양에선 사랑도 죄가 되나요
저자는 재외에서 매우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던 중산층으로 탈북을 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가 어쩔 수 없이 탈북의 대열에 들어선 것은 단지 외아들의 사랑 때문이었다. 북한에서는 유학생의 연애를 엄격히 금하고 있으며 외국인과의 사랑은 정치적으로 처벌받을 중대 사안이다. 저자의 아들은 자신의 선택이 조국에 대한 배신이라는 것과 부모를 몰락시킬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나 연인과 잠적했고 그 결단을 후회하지 않았다. 저자와 남편 또한 북쪽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이 죄가 되어버린 아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용서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대남공작원이던 저자의 남편이 남한으로 갈 것을 우려, 공금횡령죄를 씌우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 가슴 아픈 한 가정의 비극은 이념이나 사상뿐 아니라 북한이 개인의 사랑까지도 통제하고 구속하고 있다는 놀라운 증언이다. 또한 신세대에 대한 사상교육이 완벽한 구속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체제의 허술함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정신적 자유를 위한 탈북 인구가 앞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이제 탈북이나 통일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한 소수자의 도피가 아닌, 더 이상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거대한 문화이며 거부할 수 없는 물결임을 받아들여야 할 시대인 것이다.
드라마틱한 개인의 삶 속에 녹여낸 휴머니즘의 대서사시
그동안 탈북자들의 증언은 많았다. 하지만 국정원과 하나원에 머무는 동안 적응교육을 받음으로써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북한 체제를 필요 이상 부정적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차란희는 오랜 재외 생활로 국제사회의 분위기와 남한의 실상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조국인 북한 체제의 문제점과 한계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면서도 조국애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가 그려낸 평양과 북한의 모습은 지금까지 우리가 접했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그곳에서도 사람이 살고 사랑하고 웃음이 넘친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것은 저자와 남편의 깊은 사랑, 저자 부부의 아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 그리고 평양에 남겨진 가족친지를 염려하는 저자의 애절한 마음이다. 저자는 사람에 대한 예의와 사랑을 체제나 이념을 뛰어넘어 드라마틱한 개인의 삶 속에 녹여냄으로써 위대한 휴머니즘의 대서사시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신달자 시인과 소설가 이순원의 추천평
신달자 시인은 ‘모든 걸 잃고도 아들을 용서하고 아들의 사랑까지 끌어안은 저자의 모정은 몇 번이나 나를 울렸다. 나는 이 책을 덮으며 우리가 과연 그들만큼 사랑하고 있는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으며 소설가 이순원은 ‘이 세상에 아직도 이런 청춘남녀의 사랑을 갈라놓아야만 유지되는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는 대체 어느 곳이란 말인가. 이 책은 서로 나라가 다르고 체제가 다른 한 쌍의 남녀가 만나 겪고 이루어낸 어떤 사랑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그 사랑을 넘어 우리는 또 다른 한 세상을 바라본다’고 평했다.
평양에선 일흔 살 노인도 성형을 한다
남쪽사람들은 평양엔 자연미인만 있는 줄 안다. 그러나 눈꺼풀수술은 물론 안면윤곽술까지 보편화되어 있다. 그들도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며 뜨거운 연애를 하고 휴일이면 가족들과 함께 수영장과 놀이공원에 간다. 여성들은 최고급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패션을 주도하며 애인 없는 유부녀는 바보취급을 받는다. 그동안 탈북자들이 보여준 어둡고 답답한 북한의 실상과 달리, 그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자각은 같은 한반도를 살고 있는 북한 사람들을 한결 가깝게 느끼도록 해준다. 우리가 궁금해 하고 있던 평양에 대한 모든 것들이 저자의 육성을 통해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다.
저자 차란희
차란희는 1963년 최고사령부 군악단이던 아버지와 당원이던 어머니 사이에서 세 딸 중 맏이로 태어나 평양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학창시절 손풍금수(아코디언)로 활동한 그는 김일성이 참관하는 설맞이 공연에도 4년간 참가할 정도로 인물과 재능이 뛰어난 소녀였다. 졸업 후에는 당시 평양의 최고 미녀들만 허락되는 평양상점에 취업하여 최은희, 신상옥, 황장엽 부인 등 시대의 주요 인물들을 직접 만나는 기회를 가진다. 그때 지인의 소개로 대남침투간첩 전문양성학교인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졸업하고 청진연락소 전투요원이던 남편을 만나 뜨거운 연애를 거쳐 결혼한다. 그리고 현직 은퇴 후 태권도 사범으로 동유럽 국가 등지에서 활동했던 남편을 따라 16년간의 재외생활을 시작한다.
말 그대로 북한 정부의 돈독한 신임을 받던 중산층 가정의 행복은 외국인 여대생과 사랑에 빠진 대학생 아들로 인해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북한에서는 외국인과의 연애를 허락하지 않는다. 게다가 자녀의 가출은 당에 보고한 뒤 즉시 본국으로 소환되어야 할 정치적 중대 사안이다. 그들 부부는 이념과 사상의 변화가 없으면서도 당의 지시를 거스르고, 아들을 한 번 만나고 들어가겠다며 시간을 달라고 인간적 양해를 구한다. 그러나 그들 부부가 혹시라도 한국으로 갈 것을 우려한 북한은 맹렬히 추격해 왔고 그 과정에서 그는 남편을 잃었다. 사랑이 죄가 되는 나라가 자신의 조국이었다는 자각, 평생 믿고 충성했던 국가에게 버림받은 비참한 처지, 대체 무엇이 그들 가정을 죄인으로 몰았는가, 저자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위원에게 쫓기던 그와 아들은 현재 그곳의 시민권을 얻어 정착했고, 글을 써보라는 지인의 권유로 남편을 잃은 지 두 달 만에 통한의 글을 쏟아냈다. 북쪽으로도 갈 수 없고 평양의 가족이 염려되어 남쪽으로도 올 수 없는 그는 자신이 21세기 한반도의 마지막 디아스포라가 되길 희망하고 있다.
【임창용 기자 news@stv.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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