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는 슈카쓰(終活)가 크게 유행하고 있다.
비록 노년층 중심이지만,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사망할 경우 장례방식이나 재산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부터 어디에 묻힐 것인지 모두 직접 정하는 것이다.
죽음은 갑작스레 닥쳐오기 때문에 일본의 슈카쓰는 대비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사망할 사람의 지인들이 조심히 장례를 준비하는 경우가 흔하다. 혹시라도 사망할 사람의 마음이 다칠세라 각별히 조심하는 것이다.
주로 명절에 모인 친인척들끼리 쉬쉬하며 장례방식을 정하는 경우도 많다. 대부분 유언에 따르지만 유언을 남기지 않고 사망한 경우 장례방식을 둘러싸고 유족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처럼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일본과 갑작스런 죽음에 직면에 허둥대는 한국은 큰 차이가 있다. 죽음 뿐만 아니라 장묘시설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 또한 확연히 다르다.
일본의 경우 주택가에 봉안당이 설치된 경우가 많다. 삶과 죽음은 종이 한장 차이이며, 우리도 언제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생사의식이 장묘시설에 대한 반감을 줄여준다. 거부감이 아니라 친근감이다. 접근성이 좋은 봉안당은 유족들이 언제든 찾아와 참배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봉안당이 주택가에 건설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접근성이 좋은 곳이라 해도 도심지와 떨어진 곳에 멀찍이 건립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대중교통이 아니라 대부분 자가용을 타고 접근해야 한다. 접근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언제든 유족들이 찾아올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여전한 님비(NIMBY) 현상 때문에 장례식장이나 화장장 건립에 여전히 애를 먹는 지역도 많다. 내 주변 사람들이나 나 자신도 언제든 죽음을 맞이할 수 있고, 장묘시설을 통해 장례를 치르고 화장 해야 하는데도 요지부동이다.
집값 사수를 위해 목숨이라도 내놓을 것처럼 사람들은 장묘시설을 기피한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언젠가 내가 거쳐갈 곳, 내 주변사람들도 계속 쓰는 곳, 우리 모두를 위해 필요한 곳이라는 생각 말이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다. 어떤 이의 죽음은 또 다른 이들의 삶의 시작이다. 내 지인과 후손들에게 삶의 길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 죽음을 막연히 두려워하지 않고 친근하게 여기며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 한국의 장례문화도 한층 성숙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