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V 박란희 기자】글렌 라이곤의 작업에서 글자는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머물지 않는다. 겹쳐지고 가려진 문장은 읽는 행위가 어디에서 막히는지 드러내며, 무엇이 기록되고 무엇이 지워지는지를 질문한다.
‘스태틱’ 연작은 제임스 볼드윈의 에세이에서 가져온 문장을 흰색 오일 스틱으로 적은 뒤 검은 안료를 덮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글의 의미가 점차 흐려지는 대신 화면에는 흑백의 점과 선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이미지가 나타난다.
‘리댁티드’에서는 지움의 행위가 더욱 분명해진다. 텍스트를 가로지르는 X 표시는 검열이나 역사적 삭제를 떠올리게 하지만, 지워진 흔적 자체는 화면에 남아 관람자의 시선을 붙잡는다.
서울에서 새롭게 공개되는 달항아리 연작은 언어 대신 전통 도자기의 상징을 변형한다. 조선백자의 흰색을 짙은 숯빛으로 바꾸고 매끈한 균형보다 비대칭적인 윤곽과 거친 표면을 살렸다.
작품은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도예가와의 협업으로 완성됐다. 점토와 소성 온도를 달리하는 실험을 거쳐 색과 질감을 구현했으며, 전통 형식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익숙한 문화적 이미지에 다른 해석을 덧붙였다.
라이곤의 국내 첫 개인전 ‘블랙 문’은 14일부터 9월 5일까지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 본사 APMA 캐비닛에서 열린다. 전시는 문자와 도자라는 서로 다른 매체를 통해 표현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살펴본다.





